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어려운 경제 속에 고용불안을 해결하기도 하고 상생 가능한 환경을 만들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많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생활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된 후, 정부를 비롯해 전국 지자체에서도 관련 교육을 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인천에도 새로운 생협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는 가운데 15년을 이어오고 있는 생협이 있어 찾아가봤다.
동네 시장 골목,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작은 병원 하나. 얼핏 보기엔 다른 동네 병원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사연이 있다. 부평구 부개동 일신 시장에 자리 잡고 있는 평화의원 이야기다.
▲평범해 보이는 평화의원
1989년, 기독청년 의료인 40여 명이 의료시설이 낙후된 지역에 평화의원을 짓는다. 진료활동을 하던 중 동네주민에게 거의 무상으로 병원을 인수해주고 떠나게 된다.
1998년, 그 뜻을 이어받은 주민 80여 명이 모여 평화 의료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한다.
2013년, 3,600세대의 조합원 규모로 사회적 의료생활협동조합을 꿈꾼다.
평화의원은 원장이 주인인 일반 병원들과 달리, 이곳을 찾는 환자들이 주인이다. 환자가 조합원이 되어 출자금을 내어 만든 ‘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이기 때문이다.
생협이란, 지역주민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소액의 출자금으로 만든 단체다. 조합에서 판매하는 제품, 서비스로 발생한 수익을 조합원에게 돌려주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1998년 12월, 우리나라에 ‘소비자 생활협동조합법’이 처음 제정됐지만 제한적인 개별법(농협, 수협, 신협 등)이었다. 이에 생협의 기반을 마련하고 활성화 시키고자 이번에 기본법이 제정됐다. 그렇다면 의료생협은 어떤 목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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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평화의료생협 내부 간판
주민이 병원의 주인이다
“의료생협이란 정부와 시장에서 다 해결할 수 없는 의료 관련 문제들을 우리 힘으로 해보자는 취지로 모인 자발적 조직이고, 건강한 삶을 위한 일을 함께 고민하고 꾸려나가는 곳입니다.” 10년 넘게 평화 의료 생협과 함께해온 전무이사 송영섭 씨의 설명이다.
평화의원에서는 의사와 환자가 동등하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진료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아 찜찜한 기분으로 처방전만 받고 나오는 환자가 없다. 의사도 빠른 효과만을 기대하는 환자에게 마지못해 항생제를 처방하는 식의 진료를 하지 않는다.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꼼꼼한 진료와 충분한 상담, 적절한 처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반병원처럼 의료인 소유로 영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과 달리 조합원을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 ‘환자권리장전’과 ‘인천 평화의료생협’을 알리는 안내문
출자금 1계좌로 누구나 조합원이 되고 1계좌로 가족 모두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출자금은 병원의 의료기기와 시설을 구매하는데 쓰이며 탈퇴할 경우 절차를 거쳐 복지 사업에 기부하거나 돌려받게 된다. 의료시장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조합원에게 진료비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이웃이 운영하고 이용하는 ‘우리 병원’이 있고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가족 주치의’가 있다는 것이 조합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다.
아내가 조합원이라 이곳에 오기 시작했다며, “다른 병원에 비해 확실히 친절한 점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최성일 씨는 감기로 아들과 함께 방문했다.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온 정영순 씨는 이웃의 소개로 평화생협을 이용한 지 10년 정도 됐다고 한다. “선생님을 믿을 수 있고 편해서 좋다. 가끔 하는 문자 문의에도 친절하게 답해 주신다. 다른 한의원은 무턱대고 한약부터 권해서 미심쩍을 때가 있었는데, 여기선 항상 현실적인 처방을 해줘서 그게 제일 좋다.”며 “내가 주인이라는 것이 지금도 신기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물리치료를 받고 나온 정영순 씨
건강예방사업과 주민 소모임 운영
아프지 않을 때 건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전문 지식이 없어 실천이 쉽지 않다. 의료생협은 이를 위해 질병의 예방, 조기발견, 건강한 일상생활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조합원들의 건강을 지켜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생협은 건강증진운동 소모임, 만보계 보급, 만보 일지, 코스개발, 금연운동, 7가지 생활습관 지키기 운동과 질병예방사업으로 거리검진, 노인정 검진, 예방접종 안내 및 비용경감사업을 시행 중이다. 또한, 성인병 관리 사업으로 건강강좌인 당뇨교실, 고혈압교실, 비만교실 운영과 성인병 검진 기관운영, 학생검진기관을 활발히 운영한다.
▲직접 제작한 건강 관련 리플렛
▲산행 소모임 관련 게시물
평화의원 주변은 지역 특성상 상업시설이 없고 공원 접근성이 떨어지는 등 공공인프라가 적은 편이라 조합원들이 고민 끝에 직접 소모임을 만들었다. 노인건강체조, 산행, 걷기 모임, 댄스교실, 관절염 태극권교실, 탁구모임 등 건강관련 소모임이 가장 반응이 좋고 그 외에도 한글교실, 디지털 카메라, 영상, 기타, 노래, 왕초보 영어교실까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취미활동을 하고 이웃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건강까지 관리할 수 있으니 1석 3조인 셈이다.
의료사각지대의 해결을 위한 노력
“우리는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중이다. 지역사회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방치가 된다.”
연신 웃으며 말을 잇던 송영섭 이사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진다. 고독사 등 방치되는 노인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지만 국가에서 모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보살핌이 어려운 노인을 위한 케어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방문 진료도 함께하고 있다. 방문 진료는 취약계층 주민 중 가족이 없고, 만성질환이 있어 거동할 수 없는 환자를 위해 주기적으로 나가는데, 진료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먹을 것을 사서 가거나 돈을 쓰고 오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노인 소모임, 등대 어르신 활동 작품
평화의원에서 10년째 진료 중인 김석중 의사는 목소리와 말투가 참 편안하다. 환자들이 병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애착이 있기 때문에 진료가 수월하다고 한다.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으니 “병원의 평판을 듣고 찾아오는 다른 환자들의 기대 수준이 높아 가끔 부담되기도 한다.”며 웃었다. 방문 진료에 대해서는 “진료실 안에만 있다가 환자들 사는 것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방문 의료가 절실한 환자들이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보람 있다.”고 답했다.
물리치료실에 있는 침대가 만석이다. 환자가 끊이지 않고 오지만 데스크에 있는 직원들의 얼굴엔 내내 미소가 가득하다. 5년째 근무 중인 김주영 간호사에게 근무환경에 대해 물었다. “다른 병원과 달리 환자분들이 저한테도 관심을 많이 가져 주신다. 다들 동네 주민이시다 보니 행동을 더 조심하게 된다.”고 전했다.
▲ 가정의학과 전문의 김석중 의사
▲ 데스크의 김주영 간호사
제2의 창립, 사회적 협동조합
생협 기본법이 생긴 후 사회적 생활협동조합(이하 사회적 생협)으로 전환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전 생협법 만으로는 운영에 한계가 있었지만 사회적 생협이 되면 공식 비영리 기관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고 제도적인 지원도 생긴다고 한다.
9월 전환을 계획하고 있어 조합원의 동의를 받고 원래 1만 원이던 출자금을 5만 원으로 늘려야 해 요즘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는 송영섭 이사는 “기존에는 생협, 특히 의료생협에 대한 인식이 약했지만 사회적 생협이 되면 점차 개선되고 필요에 따라 국가와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사회적 협동조합법’ 자체가 큰 법은 아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이런 가치를 실현해 나가고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 사회적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안내문
▲운영 내용과 총회 보고서가 공지된 게시판
생협은 누구나 만들 수는 있지만 누구나 잘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생협은 더더욱 그렇다.
1994년 안성을 시작으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인천, 안산, 서울, 대전 외 총 15개의 의료생협만 한국 의료생협연대에 등록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중에서도 인천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생겼고,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어 새로 생기는 의료생협들의 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병원 운영’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 생협도 속속 생기고 있다. 그런 곳은 조합원의 건강이 아닌 수익에 집중 하다 보니 운영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생협과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생협으로의 전환이 더 필요한 것이다.
▲송영섭 전무이사
다양한 사람들이 생협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다 보니 의견과 요구도 각양각색이기 마련이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고 이견을 조율해 하나로 끌어가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는 송영섭 이사는 조금씩 성장해 십 년 전보다 20배 이상 커지고 안정도 됐고, 미래를 위한 모색도 할 수 있게 된 지금의 평화 의료생협을 보며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의료생협이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서 역할이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화 의료생협이 모두가 건강한 사회로 가는 나침반이 되길 희망해본다.
<주란 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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