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허겸의 33세손이 들려주는 원인재 이야기

 

    원인재를 지키는 인천 李氏

‘원인재’, 인천 이씨의 시조인 이허겸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모시기 위해 19세기 초에 지어진 한옥이다. 인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사료이자 인천시 문화재 5호인 원인재에 지금도 머물고 있는 이씨가 있다. 이허겸의 33세손 이준상(79) 씨에게 인천의 과거와 인천 이씨 문중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중 모후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된 인물이 있었다. 그 후손 중 ‘아찬 허기’가 신라 경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당의 최고 미녀인 양귀비로 인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고 한다. 아찬 허기가 그 때 황제 현종을 도운 공으로 황제의 성인 이씨 성을 하사 받고 돌아온다. 그 허기의 10세 손이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이다.

이허겸 때부터 인천 이씨 집안은 크게 번성했다. 고려 현종 때에 ‘상서좌복야’로 ‘소성현 개국후’에 오르며 소성현에 식읍 1천 5백호를 하사 받은 것이다. 그 자손이 대대로 소성에 머무르며 고려 말까지 많은 내,외손들이 왕과 신하로서 정사를 주도했다. 인천 이씨 문중의 내.외손에는 인예태후 등 열분의 왕비와 여덟 분의 왕인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이 있다.

신도비와 첨소문

이 노인은 마치 그 일을 보고 들은듯 생생한 표정으로 전해준다. “인천 이씨의 뱃속에서 왕이 그렇게 많이 나왔으니 대단한 거지. 왕 말고도 지금으로 말하면 총리, 부총리 같은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고.” 귀족사회였던 고려 시대에 일반가문이 귀족대열에 끼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것이다.
그 때의 소성이 지금의 인천이다. 인천은 본래 고구려 때 '매소홀현'이라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때 '소성현'으로 바뀌었다. 고려 숙종 10년(서기 1105년)에는 왕의 어머니인 인천 이씨 인예태후의 고향으로 경사의 근원지라 하여 '경원군'으로 승격했고 인종 때에는 어머니 문경태후의 친정이라 하여, '인주'로 불렸다.

 


 


 

공양왕 2년(서기 1329년)에는 고려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인주가 왕의 어향(왕가의 본관)이라 하여 다시 '경원부'로 승격했으며 이때부터 인천을 일컬어 7대에 걸쳐 왕의 본관이라 하여 '7대 어향'이라 칭했다. 그 후 조선 태종 13년(서기 1413년0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인천'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인천 이씨의 본관도 '소성, 경원, 인주, 인천'으로 따라 바뀌어 왔다.
“지금도 경원대로가 그대로 남아 있잖아. 시청 앞 큰 길은 인주대로고, 그러니까 인천의 역사가 인천 이씨의 역사랑 맥을 같이 하는거지....”

원인재는 이 시조 이허겸의 묘역을 수호하고 제사를 모시기 위해 19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현재 인천여고 자리인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1994년 택지개발로 인해 해체 되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승휴당

“94년에는 여기 아무것도 없었어. 3월 30일에 내가 와서 한옥 기능사 목수들이랑 2년 동안 건물을 지은거야.” 이 노인은 불편한 다리로 건물을 안내해주며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키다 보니 이렇게 나이를 먹었네.” 라는 이노인의 표정이 얼핏 쓸쓸하다. 서울 사람이라는 그는 이제 서울에 가봐야 아는 사람이 없다. 나이 많던 사람도 적던 사람도 다 죽고 없더란다. 이제 그에게 원인재는 고향이다.

검은 기와의 건물이 원인재 본 건물이고 푸른 기와 건물들은 원인재를 옮겨오며 새로 증축한 건물들이다. 새로 지은 건물의 푸른 지붕 처마에는 조상의 아름다운 은덕을 이어간다는 뜻의 '승휴당(承休當)', 조상을 생각하며 자신의 덕을 닦는다는 '율수실(聿脩室)', 인에 힘쓰자는 뜻의 '돈인재(敦仁齎)' 등 의 현판이 달렸다. 가장 큰 건물 '돈인재'에는 기둥마다 주련을 걸었다.

돈인재

 


 


 

4면을 빙 두른 26개의 주련의 시구는 '어혁인이삼한구족(於赫仁李三韓舊族)'. "아, 훌륭하구려, 인천 이씨는 한국역사의 뿌리 깊은 씨족이라네"로 시작해 ‘명인승휴유래천력’. “명인당 승휴당을 비롯해 모든 건물을 천년만년 보존하자.”로 끝난다. 인천 이씨가 인천에서 살아온 이야기와 후손들의 바람이 금빛으로 새겨졌다. 

이제는 일년에 한두 번의 가문 행사를 제외하고는 연수구 문화원이나 구청에서 진행하는 전통 혼례, 전통 성년식이 열리고 학생들의 백일장이나 시민들의 전시회를 한다.
“처음 이사 왔을때는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많이 찾아왔어. 지나가던 사람들도 신기해서 많이 구경왔고. 인천 이씨의 유래, 인천 역사에 대해 좌악~ 얘기해줬지. 다른 문중에서 자문도 많이 구했고....” 지금은 날씨도 춥고 인적이 뜸하다. 


 


 


 

돈인재 옆 소나무 숲 언덕에 이허겸의 묘가 있다.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고 간치도, 까치섬이라고 불리는 명당자리이다. 묘를 잘 써서 인천 이씨가 그렇게 잘 살았던 거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보다도 정말 잘 아는 인천 사학자가 있었는데, 그 분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인천 이씨 가문에 관심이 많았던 사학자의 이야기를 꺼내며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던 이 노인은 한참을 생각하다 결국 모르겠단다. 잘 알고 지내던 이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이가 어찌 옛 이야기를 그리 생생히 기억하는 지를 물었다. 어렸을 적부터 쭈욱 듣고 자란 이야기라 그렇다는데 요즘의 20,30대 청년들도 어르신처럼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모르지 뭐, 명절에 손자가 왔길래 인천 이씨가 이런 집안이니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얘기하라고 말해주긴 했는데 얼마나 기억할지.” 본인만 알지 않겠냐며 껄껄 웃는다.

원인재와 이준상 어르신

자기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세상이고,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 지내다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노인이 많은 세상인데, 요즘엔 그런게 무슨 소용이냐며 다시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인의 말처럼, 뿌리가 흔들리는 사회라 원인재는 더 가치 있다. 그의 말투, 눈빛에는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드러나는 가문과 인천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담겨 있다. 단아하고 소박한 건물에 찬란한 세월을 품고 있는 원인재가 그러하듯 말이다.

주소 : 인천광역시 연수구 경원대로 322(연수동)
문의 : 032-821-1230
관람 : 오전 10시~ 오후 5시

(i-View 주란 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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