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짓다

일생의 반 이상을 ‘옷’에 쏟아 부은 여자가 있다. 돈이며 젊음이며 열정이며, 오롯이 옷을 위해 그녀는 두려움 없이 내던졌다. 그리고 “그건 숙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옷을 짓는 사람이다.

역사를 알기위해 다양한 사료가 필요하다. 당시 사람들이 쓰던 글, 읽던 책, 살던 집, 입던 옷…. 한 집안의 가보를 엿보고, 죽은 사람의 묘를 들춰내면서까지 우린 역사를 탐닉한다. 웬만한 집요함과 열정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박혜순 씨는 그중에서도 ‘옷’으로 역사를 읽는다. 다시 말하면 ‘전통복식’으로 역사를 재현해 낸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당시 복식을 그대로 만들어서 재현하는 일이죠. 우리 선조들이 입었던 전통적인 복식을 만드는 게 제 일이예요.”
땅 속에 묻혀있다 나온 유물, 특히 섬유는 다시 빛을 받음과 동시에 금세 삭아버리기 때문에 전통복식을 그대로 구현하는 작업은 역사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가치가 상당하다.

 

박혜순 씨


“결혼하고 막 인천으로 왔어요. 결혼한 뒤에 바느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으니, 벌써 30년도 넘은 얘기네.” 박 씨의 어머니는 바느질에 일가견이 있는 종갓집 맏딸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고배운 바느질 솜씨를 갈고닦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한복집에서 배우며 기능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그러던 중 89년, 무형문화재 89호 침선장 정정완 선생을 만났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전통복식예술인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꾸준히 연구하고 배워야 하는 일이예요. 더 알고 싶고, 진짜유물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에 늦게 대학원도 다녀왔죠. 한복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요.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그러죠. ‘남들은 10년이면 박사 따는데, 우린 30년 넘게 했으니 다른 걸 했으면 뭐라도 했다’고.” 그만큼의 열정이 있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한복을 만드는 일이 아닌, 유물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작업인 만큼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나 분묘 발굴시 발견된 복식, 서책을 통해 연구를 통해 당시 사용하던 직물과 바느질기법, 염색기법까지 연구해 그대로 재현한다. 이렇게 완성된 그녀의 작품들은 박물관에 전시되거나, 학교에서 교육용 등으로 사용된다.


 

 


그녀가 한 땀의 바느질을 수놓을 때마다 역사가 엮인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유물 하나 재현하려면 시간이 보통 걸리는 게 아니예요. 실제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에 몇 번이나 찾아가야 하죠. 그 형태, 바느질 기번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요. 옛날 방식 그대로 손바느질로만 옷을 만들기 때문에 몇 달 이상 작업이 계속돼요.”
이렇게 열과 성과 시간을 쏟아야 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가끔은 ‘멀미가 날 정도로’ 힘이들 때도 있는 그녀지만 작품을 완성한 뿌듯함과 바느질의 중독성에 멈출 수 없다고.
지금도 그녀는 바느질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고종황제의 딸, 덕혜공주의 옷을 재현하는 중이다.
“바느질은 마약과 같아요. 알면 알수록 재밌죠. 특히 한복은 뜻이 담겨있는 복식이예요. 색, 깃, 문양.. 전부 뜻이 있어요. 어쩜 그렇게 땀 하나에도 뜻이 있는지, 안 해본 사람은 모르실 거예요.”

덕혜옹주 저고리


작품이 완성되고, 그 작품이 전시되는 날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녀는 11년, ‘남동구 문화재 속 인물들의 옷차림 전’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인천사람들이 이런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을 줄 몰라서 “과연 사람들이 보러 올까?”하는 의심마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결과적으로 박물관에서 전시연장 요청이 들어와서 2달간 연장전시를 하게 됐었죠. 얼마 전에 미추홀도서관에서도 전시회를 가졌었는데, 우리 옷의 아름다움에 황홀해 하는 것 같았어요. 다들 이렇게 예쁜 옷인지 몰랐다면서요. 도서관 측에서도 시민들의 반응에 놀라더라고요.”

 


 

 


전시회 때마다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해도, 한복업계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생활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에 속하게 되어버린 한복, 불경기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박혜순 씨는 한복의 미래를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민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복이 사라질 일은 없지 않을까요? 다만 한복의 역사에 굴곡이 있는 거겠죠. 우리 민족이 어디 한순간에 사라질 만큼 나약한 민족인가요? 지금은 잠시 힘든 골짜기에 있지만 언젠가 한복의 위상이 다시 우뚝 서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어요.”

 

 

 


전통복식을 연구하는 그녀에게 퓨전한복에 대해 물었다.
“역사 속에서 한복이 끊임없이 변화해 왔듯, 퓨전한복도 그런 변화라고 생각해요. 다만, 지금 시중에 퓨전한복이라고 나온 것들은 대게 국적불명의 옷이죠. 퓨전이지만 그 속에 한국적인 것들을 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문양과 색, 깃 하나에도 뜻이 담겨있는 것이 우리의 복식이다. 퓨전이라는 이름을 빌려 그런 뜻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지금 퓨전한복에 들어가는 문양과 색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들이 많아요. 진정한 우리나라의 복식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내용’있는 옷을 위한 연구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박씨는 후배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금도 몇몇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한두 해 배워서 알 수 있는 분야의 일도 아닌데다, 한복시장이 어렵다보니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실정이다.
“후배양성은 나의 사명이에요. 더 많이 가르쳐 주고 싶고,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지만 사람이 많지가 않아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제가 있는 때 전통복식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한복의 역사,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있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역사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천광역시 차지은 청년기자>